우리는 “노란 조끼 파리지엥들”이라고 쓰인 기고 글을 받고, 3월 16일 봉기에 대해 이미 알려진 것에 보충하고자 이를 게재하기로 했다. 실제로 이 글은 너무 자주 무시되거나 캐리커처에서 다뤄지는 ‘약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는 투쟁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돈, 그들의 피, 그들의 금은보화를 가지고 떠날 것이다.”

- 광기(Lunatic), ‘서문(Introduction)’, 악마의 눈(Mauvais Oeil).


“샹젤리제에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있다.”

- 죠 데쌍(Joe Dassin), ‘샹젤리제’


 18차 행동은 샹젤리제에 있는 명품 상점을 대규모로 파괴하면서 두드러졌다. 또한 샹젤리제에 있는 모든 것들을 광범위하게 체계적으로 ‘재전유(reappropriation)’했다. 우리는 현재, 이러한 ‘약탈’ 사건을 단지 비정치적인 도둑과 약탈자의 소행으로 치부하는 언론의 공세에 직면해있다. 우리는 지난 토요일 대중적인 ‘약탈’ 투쟁을 정치적으로 찬미함으로써, 이를 우리의 방식대로 재해석하고자 한다.


<우리는 소득에 근거한 부유세 부활을 요구한다.> (중의적인 의미로 ‘정부가 부유세를 폐지했으니, 우리의 직접 행동으로 명품 상점들로부터 ‘우리가 직접’ 부유세를 걷겠다.’라는 의미가 내포된 상징적인 문구이다.)


 오는 토요일 밤, 우리는 논설위원들을 규탄하고자 BFM TV에 간다. : 우리는 실망하지도 놀라워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항상 똑같은 식상한 발언을 하며, 우리의 투쟁을 범죄시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그 이름도 ‘유명한’ 파괴자들(casseurs)을 공황 상태에 빠트리고자 노력한다. 언론 매체에서는 노란 조끼들을 모두 잔인한 군중, 깡패, 도둑, 파괴자, 가장 야심찬 테러리스트 조직에서 동원된 폭력의 물결 속에서 불태우고, 훔치고, 약탈하는 이들로 매도한다. 언론은 계속해서 극단적인 표현까지 써가며, 노란 조끼를 매도한다. 현 상황을 특징짓기에 완벽하게 충분한 단어는 아무 것도 없다. : <France TV Info>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가 황폐해졌다.”고 표현했다. <Le Monde>는 “끓어오른 분노”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우리는 화염에 휩싸인 푸케(Fouquet) 레스토랑의 사진을 들고, BFM TV 앞에서 항의 행동을 할 것이다. 우리는 노란 조끼들이 여전히 건재함을 나타낼 것이다.


권력과 사유재산의 충견(chiens de garde) ‘언론’


 대통령의 야만적인 어록 : “공범들”이 “자객”을 보내어 “약탈”하도록 한다. 샹젤리제는 가스 마스크를 쓴 야만족 패거리들과 바이킹의 습격으로 인해, 혼잡한 전쟁터로 변했다.  이 대목에서, 봉기의 ‘비정치화’가 이루어지는 동시에 시위대의 ‘비인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언론은 마치 사람들이 미쳐버린 것처럼, 약탈과 파괴를 이해할 수 없는 행위로 묘사하며, 이를 끔찍한 군중들의 영향 하에 있는 것처럼 묘사한다.


 언론은 마지못해 은행에 대한 공격의 정치적 성격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거리에 있는 상점과 백화점의 경우에도 역시, 시위대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더욱 용이하다. : 그저 주머니에 뭔가를 챙기길 원하는 약탈자. 즉, <L'OBS> 신문은 한 측면에서 ‘어떤 이데올로기적 구실이나 무조건적인 주장만으로 잔인함을 해소하려는 경향’으로 표현되는 ‘극좌파’들과 노란 조끼를 구별짓고자한다. 다른 측면에서는 ‘상점에서 무엇인가를 취하려는 일부 파괴자(casseurs)’들과 노란 조끼를 구별하고자한다. 항상 똑같은 허구적인 망상이 신문 사설에 등장하면서, “극좌파”, “파괴자(casseurs)”들과 우리를 구별 짓는다. 또한 이는 완벽하게 식민주의적이고 인종차별주의적인 환상이다. 그들은 반란군을 “침략자”, 외부세력(“진짜 노란 조끼”가 아닌 사람), “문명화”가 필요한 “야만인”으로 만들고자한다. 그들에게 반란군은 여전히 “위험한 계층”의 일부이다. 또한 언론과 경찰은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남부 지방의 많은 국가에서도 혹은 재난 상황에서도, ‘약탈’과 ‘폭동’에 관한 용어를 자유자재로 소환한다. 이를 통해, 그들은 반란을 일으킨 비 백인집단의 모든 형태의 봉기, 자기 조직화, 자기 방어를 애써 ‘비정치화’하고 있는 것이다. 학자 마튜 히구스트(Mathieu Rigouste)가 ‘노예 제도와 (경찰 지배하에 있는) 식민주의의 계보’에서 잘 분석한 것처럼, 언론은 경찰의 프로파간다를 중계 보도한다. 모든 법 집행은 “식민주의적 레퍼토리”와 노예화 기법에 기반을 두고 있다. :


 “현대 경찰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수호대(la maréchaussée)는 밤나무를 따기 위해, 노예 농장을 설립했었다. 연결망을 통해 스스로를 조직하고, 탈출한 노예들은 사보타주와 주인의 재산 파괴를 실천했다. 노예들에 대한 사냥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은 야생 짐승들로 표현되었다. 그들의 탈출이 끝날 때까지 밤나무 노예 농장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노예제 질서에 맞서 투쟁했다. 또한 스스로를 방어하며 자유롭게 살고, 자발적인 자치 공동체를 위해 투쟁했다.”

- <억압과 저항>, 마튜 히구스트(Mathieu Rigouste)


 들라크루아(Delacroix)의 그림에서 묘사된 것처럼, 바스티유를 접수했던 고귀한 반란을 언급하는 대신에, 공화국은 ‘폭동의 발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불복종 운동을 야만적인 방식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 묘사하면서, 그것이 ‘내면적 저주를 불러일으키는 정치적 무기를 제공한다.’며 매도한다. 따라서 ‘야만성’에 대한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 공세를 통해, 정부는 “사냥”과 경찰 폭력, 폭력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한다.


 토요일에 발생한 일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적 전쟁에서 확립된 ‘질서’ 진영을 선택했다. 부르주아지 언론은 충견으로써 그들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L'Humanité(위마니떼)> 신문과 같은 곳은 노란 조끼 운동(계급 반란)의 의미를 ‘억지로’ 축소시키는 이들의 실체를 폭로하고 있다. ‘약탈’로 인해 부르주아지 언론이 충격을 받을 때, 우리는 진열장에 있는 물건의 가격과 외설에 의해 충격을 받은 노란 조끼이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약탈’이 더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노란 조끼이다.


<쉽게 목격할 수 있는 파괴자(casseurs)들. 대통령의 성급한 미디어 조작.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주장들에 답변하지 않으면서, 운동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려는 속임수였을 뿐이라면?


“파괴자들이 정치권력의 조력자가 되게 하려는 것인가?”>


그래서 과연 누가 진정한 약탈자인가?


 부르주아지 언론의 모든 담론은 우리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또한 첫 ‘약탈은 구조적으로 거대하게 발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역자 주 : 식민주의, 제국주의의 약탈과 시초 축적을 은폐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 자본가, 식민주의, 신식민주의. 진정으로 약탈당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토지를 침략하고, 리비아와 같은 노예 국가들을 착취하면서 여전히 기쁨을 만끽하는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차드(Chad)에 개입하여 식민지화를 계속하는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휴고 보스(Hugo Boss)는 나치에 협력하며 재산을 축적했고, 그들은 식민주의적 방침으로 대량학살 사업에 스스로 참여했다. 초창기 루이 비통(Louis Vuitton)은 식민주의자를 섬겼고, “탐험가”들의 “항해”와 식민주의적 학살에 협력하지 않았는가? 루이 비통은 식민주의적 전시회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계속 견지하지 않았는가? 현재, 루이 비통과 불가리(Bulgari)를 소유하고 있는 LVMH는 자회사 부문을 위해, 마다가스카르(Madagascar)에 생산품 일부를 수출했다. 이 그룹은 프랑스 내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프랑스의 이전 식민지에서 비 백인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위해, 식민주의적 관계의 영속성을 이용했다. 푸케(Fouquet's) 레스토랑을 소유한 바히헤(Barrière) 그룹은 모든 신 식민주의자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코트디부아르(Côte d'Ivoire) 사람들의 피를 착취함으로써 돈을 벌 수 있도록, 아비장(Abidjan)에 카지노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모로코 마라케시(Marrakech)에 최고급 호텔을 짓지 않았는가? 매년 7월 14일(역자 주 :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 샹젤리제(Champs-Elysees)는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아동들을 강간했던 위대한 식민주의 군대를 기념하는 무대(le théâtre)가 된다. 계속해서 목록을 나열해야만 하는가?


3월 : 자체적인 최저임금(SMIC) 증가


 “슈퍼마켓이 불편한 곳에 위치해있어서, 쇼핑하는 것이 복잡하다.”

- 메에스(Maes), 생활에 끼치는 손해


<엿같은 휴고 보스. 상점은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언론과 경찰 조합이 제 아무리 우리 투쟁을 반복적으로 매도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의 준비 여부와 관계없이, 논리적이고 전략적이며 정치적인 행위였다는 점을 느꼈다. 3월 16일, 우리는 거대한 자유 시장에 대한 엄청난 재분배와 공유 조치를 목격할 수 있었다. 빈곤한 사람들의 땀방울로 생산되는 것들에 대한 대중적이고 즐거운 재전유(reappropriation) 조치가 단행된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필요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리고 우선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과 사회 계급간의 불평등에 대한 적극적인 도전을 대표했다. : 다수가 빈곤과 착취에 시달리고 있다. 소수는 부유하며 착취하고 있다. 그래서 다수는 부자들의 것을 접수하여 빈곤한 사람들에게 재분배한 것이다. 노란 조끼 운동은 그저 생존을 위해 노동하도록 강요당하는 사람들의 반란이며, 심지어 월말까지 버티기에도 충분치 못한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반란이다. 샹젤리제의 상점을 ‘약탈’하는 것은 (더 이상) 착취당하지 않고 부족한 돈을 공급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실제로 폐지되기 전의 ISF(부유세)는 원천징수 방식이었다. 따라서 약탈당한 상품들과 우리가 원천징수당한 부유세는 좋은 ‘거래’로 볼 수 있다. 재 전유된 가방, 옷, 보석들이 많은 이들의 부족한 임금을 보충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리고 정부의 사회적인 양보를 기다리는 동안, 이러한 자체적인 최저임금 충당은 월말을 좀 더 평화롭게 맞이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아무 것도 묻지 말고, 모든 것을 접수하라>


“그들의 법칙 위에서, 

우리는 항상 거부당해왔기 때문에,

가장 뒤쳐진 자들이 

가장 앞장서게 될 것을 믿는다.”

- 광기(Lunatic), ‘서문(Introduction)’, 악마의 눈(Mauvais Oeil).


 이렇게 위대한 무료 행사는 “호화”, “명품” 매장의 거대한 창들로 이루어진, 이 장소의 폭력성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곳의 모든 물건들은 오로지 부자들을 위해서 만들어진다. : 그들은 ‘외설’을 통해 또 다른 방식으로 계급 지배를 확립한다. 사람들이 거리에서 죽어갈 때, 푸케 레스토랑에서 한 끼 저녁식사로 15,000유로를 지불하는 것이 외설(변태)적이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폭력은 상징적인 폭력과 결부되어 있다. : 빈곤한 사람들은 이곳에서 시민권을 가질 자격조차 없다.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은 휴고 보스나 푸케 레스토랑에 입장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빈곤해보이거나, 흑인 또는 아랍계 사람으로 보이는 이들은 다시 출구로 되돌려 보내져, 쫓겨나기도 한다.


 이제 쟁점은 부자들을 소름끼치게 했던 지난 토요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 모든 사람들이 ‘호화로움’에 접근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호화로움이 아닐 것이다. 상징적으로, 지난 토요일의 ‘약탈’은 계급 지배를 되돌리려는 또 다른 방식의 투쟁이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부자들이 판매하길 원하는 ‘풍요로움(L'opulence)’에, 노란 조끼들이 침을 뱉으려하는 행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노란 조끼들은 그들이 원할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모든 것들을 한 번에 접수해버렸다. 그리고 부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노란 조끼들은 부자들의 호화로운 이상(idéal)에 순응하고자 약탈하는 것이 아니다. 부자들의 이상이 노란 조끼들을 때려 부수기 때문에, 부자들의 전형(modèle)을 파괴하려는 것이다. 노란 조끼들은 더 이상 아무도 굴욕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푸케 레스토랑을 불태웠다. 푸케 레스토랑은 평상시에는 노란 조끼들(과 같은 빈곤층들)에게 금지된 장소였다. 그러나 토요일만큼은 노란 조끼들이 왕과 여왕이었다.


<위의 사진은 공격을 당했던 자본주의적 성공과 성차별주의적 풍요로움의 이상향이다.>


 위와 같은 대형 브랜드들은 노란 조끼를 즐거움의 전형으로 삼고 싶어 하지만, <L'OBS> 신문이 이해한 바와 같이, 행복은 전혀 다른 곳에서 온다. : "파괴자(casseurs)들이 행동하고 있다. 이는 그들의 즐거움이다." ‘약탈’은 기쁨 속에서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휴고 보스는 샅샅이 파헤쳐졌으며, 진열장과 창문은 부서졌고 불길이 일면서, 옷가지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던져졌다. 불가리 매장 앞에서, 거대한 금속 판자를 들어 경찰들에게 던진 사람은 전체 군중들 이었다. 청년들은 파리 생제르맹(PSG) 저지를 발견하고는 매우 기뻐했다.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공을 도난당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져갈 수 있는 선물이 생겼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들은 각자가 발견한 것들을 크기와 취향에 맞게 서로 교환했다. 노란 조끼들의 기쁨은 개인적인 이익을 챙기는 데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모든 전리품은 모두에게 행복하게 나누어졌다. 노란 조끼들의 기쁨은 집단적인 힘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리고 “혁명!”에 대한 외침으로부터 온 것이다.


 ‘약탈자’들은 곧 경찰들에게 침탈당했다. 그들은 두려워했다. 그리고 경찰들은 거리를 두고 이를 잠시 동안 지켜보며, 그들을 포위했다. 가장 대규모로 체계화된 역사적 ‘약탈’을 조직했던 위대한 사람들은 경찰의 반동적 태도와 함께 곤봉 세례를 맛보아야했다. 경찰들이 불쾌감을 느꼈다면, 더욱 성공적이었다는 것이다. 오후의 시간, 세상은 그렇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 원문 기사 출처 :

https://acta.zone/le-16-mars-la-guerre-des-pauvres/

posted by macronde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