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축제 : 새로운 증언.

"- 우리는 그저 깔아뭉개야할 공격 대상이었습니다.

- 발포자 2명이 사람들의 머리를 조준했습니다.

- 그들은 저를 ‘더러운 혼혈 가우초(gaucho)’라 불렀습니다.

- 제 머리는 온통 피로 흥건했습니다.

- 짐승처럼, 루아르 강으로 도망치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Le Journal du Dimanche(이하 JDD)>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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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DD>는 148명의 충격적 증언을 수집했다


"- 발포자 2명이 사람들의 머리를 조준했습니다.

- 그들은 저를 ‘더러운 혼혈 가우초’라 불렀습니다.

- 제 머리는 온통 피로 흥건했습니다.

- 우리는 그저 깔아뭉개야할 공격 대상이었습니다.

- 루아르(la Loire) 강으로 도망치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JDD>는 오늘 긴 인터뷰 기사를 게시했다. 기사는 낭트 루아르 강변 음악 축제 당일 밤, 경찰에게 공격당했던 수십 명의 증언을 다루고 있다. 끔찍한 이야기이다. 공격은 사전 경고도 없었고, 정당화될 수도 없으며 야만적이었다. 증인은 “우리는 이 상황을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불과 몇 분 동안, 경찰은 야밤에 군중을 향해 최루 가스 수류탄 33발, 폭발형 수류탄 10발, 고무탄환 12발을 발포했다. 그것은 테러였다. 곤봉 세례가 이어졌다. 많은 사람이 부상당했고, 뼈가 부러졌다.


 한 여성이 말한다. “저는 사람들이 강물에 빠지는 걸 보았습니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루아르 강에 빠졌고, 다시 강둑으로 헤엄쳐오기 어려워보였습니다. 우리는 몇 명이서, 그녀가 깨어있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말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올 수 있도록, 조명을 비춰주었습니다.”


 증인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경찰의 만행을 진술했다. 경찰은 본인들의 잘못으로 인해 사람이 강물에 빠졌음에도, 그 곤경에 대해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 “우리가 경찰에게 가서 ‘저기 강물에 사람이 있다’고 말했는데, 우리는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 “경찰은 우리에게 ‘저리 가라, 아니면 체포하겠다!’, ‘그건 우리 일이 아니고, 소방관의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상상해보십시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력을 다해 도망치고, 강물에서는 살려고 발버둥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최루 가스가 사방에 자욱하고, 수류탄이 폭발하고, 경찰은 사람들을 폭행했습니다.”


우리는 낭트 청년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 공격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한다. 국가적 중대사다. 정부와 경찰의 손에는 씻을 수 없는 핏자국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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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JDD>의 기사 전문이다.


“[단독] 스티브 사건 : <JDD>는 논란이 되고 있는 경찰 진압작전에 관해, 148명의 증언을 수집했다”


 낭트 음악 축제 당일 새벽, 스티브(Steve Maia Canico)는 논란이 되고 있는 경찰 진압작전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내사부(IGPN) 보고서는 경찰 진압의 결과적 책임과 심지어 그 존재조차도 부정하지만, <JDD>는 그날 밤 사건에 관한 또 다른 입장을 제출했다. 지역 단체 <Media’Son>과 함께 148명의 증언을 수집했다. 스티브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부는 그저 분노와 고통 등 몇몇 단어에 천착할 뿐이다. 다른 사람은 이보다 좀 더 나아간다. 많은 사람이 정확하고, 세심하게 그날 밤의 혼란과 무지막지한 잔혹함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폭력과 놀라움. 6월 21일 밤, 낭트 음악 축제에서 세바스티앙(Sebastien)은 강물에 빠졌다. 그날 밤, 32세 도장공 세바스티앙은 친구의 권유로 루아르 강변 윌송(wilson) 거리에서, 매년 열리는 일렉트로닉, 테크노 음악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그가 말한다. “좋았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앉아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난간이 없었기 때문에, 루아르 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습니다.” 세바스티앙은 물을 두려워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는 수영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러나 그때, 세바스티앙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친구와 함께 맥주 몇 캔을 마시며, 캔 따는 소리가 “정말 시원하다”는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다음날 예정된 세바스티앙 어머니 생일파티에 대한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는 굉음이 들렸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최루 가스 연기에 휩싸였습니다. 눈이 따가워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습니다.”


“정말 엿같이 잔인했습니다. 우리는 소송을 제기해야합니다”


 30대 청년 세바스티앙은 방향 감각을 상실하여, 친구를 잃어버렸던 기억을 떠올린다. “저는 두 가지가 두려웠습니다. 첫째는 부상을 당해 땅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60대 어머니께 인계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루아르 강에 빠져 익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눈앞이 안 보이는 한밤중에, 길을 찾으려 울부짖으며 더듬거렸다.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지만, 사실 최루 가스가 그나마 덜한 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하필 루아르 강 방향이었습니다.” 강가에서 “2미터” 가량 떨어져있던 그는 무게중심이 기울면서, 강 쪽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때 한 사람이 사력을 다해, ‘저기 물속에 사람이 빠졌으니 구조해야한다’고 비명을 질렀다. “그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소리쳤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달라고 저에게도 요청했었습니다.”, 세바스티앙이 한 숨을 쉬며 얘기를 이어간다. “그러나 저는 수영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허우적대며, 강물을 조금 마셔야했습니다.”


겁에 질린 그는 끔찍한 상황을 피하려고, 곧바로 루아르 강변에서 달아났다. 강물 속에선 적어도 3명이 여전히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는 자책하며, 나지막이 얘기를 이어갔다. "저는 겁쟁이였습니다. 심한 무력감을 느낍니다. 저는 혼자였습니다. 경찰과 그렇게 직접 맞닥뜨린 것도 살면서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은 제가 조금만 더 빨리 걸었으면, 강물에 빠졌을 거라며 저를 안심시켰습니다. 정말 엿같이 잔인했습니다. 우리는 소송을 제기해야합니다. 그러나 저는 스티브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의 상황을 몰랐습니다."


"저는 위험을 직감했습니다."


 89명이 소송을 제기했다. 윌송 거리를 기준으로 새벽 4시까지, 열 댓 개의 음향장비 사용허가를 받았던 상황이다. ‘벙커’라 불리는 건물 맨 서쪽에서 열 번째 장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게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예정된 시각이 조금 지났지만, 출연진은 과감하게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 내사부 행정 보고서는 경찰 진압의 결과적 책임과 심지어 그 존재조차도 부정한다. 그러나 <Liberation>과 <Nantes revoltee>가 폭로한 영상과 이에 대한 다양한 증언 수집 덕분에, ‘경찰 진압이 4시 30분경 시작, 4시 52분 종료되었다’고 추정된다. 약 30분 동안, 최루 가스 수류탄 33발, 폭발형 수류탄 10발, 고무탄환 12발이 군중을 향해 발포되었다. 적어도 수십 명의 축제 참가자가 강물에 빠졌다. 그날 밤 실종되었던 스티브는 한 달 이상이 흐른 뒤, 루아르 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끔찍했던 밤이 지나간 다음날, 정부 당국과 축제 주최 측 간 중재자 역할을 담당했던, 지역 단체 <Media'Son>이 증거 수집을 호소했다. 당일 밤, 축제에 참석했던 148명의 증언을 수집할 수 있었다. 지난 7월 3일 세바스티앙을 포함하여, 그중 89명이 “공권력에 의한 생명 위협, 고의적 폭력”을 규탄하며 집단 소송을 제기했다. <JDD>는 지난 6월 23일 여러 사람을 만나 단독 인터뷰한 증언을 보도했다. 30여개의 생생하고도 뜨거운 개인적 이야기, 어두운 단면을 보여준다. 스티브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부는 그저 분노와 고통 등 몇몇 단어에 천착할 뿐이다. 다른 사람은 이보다 좀 더 나아간다. 많은 사람이 정확하고, 세심하게 그날 밤의 혼란과 무지막지한 잔혹함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경찰을 굳이 증오하지는 않는다


 고소인들의 연령대는 17~34세이다. 남성, 여성, 고등학생, 대학생, 노동자 등 다양하다. 그들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충격을 받았다. 트라우마틱한 상처를 남기는 거의 모든 사건에서, 공권력에 의해 덧씌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보통 “심리적 영역”이 그렇다. 그런데 이는 낭트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한편, 사건 당일 주택가에서 멀리 떨어져, 음악 소리가 주변을 방해하지 않는 루아르 강변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간단한 축제를 열었었다. 그 한밤중에 최루 가스가 날아든 것이다.


 우리는 피해자의 증언을 읽으며, 경찰에 대한 증오나 정치적으로 편향된 견해를 찾아볼 수 없었다. 모욕적 발화도 거의 없었다. 고작 5명만이 “짭새(flics)”라 표현했을 뿐이다. 다른 이들은 “경찰(police)”, “질서유지대(forces de l’ordre)” 또는 “기동대(CRS)”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첫째로, “그들의 역할은 혼란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둘째로, “그들은 의사소통하는 대신, 모든 걸 파괴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사전 경고도 없이, 최루 가스가 사방에 난사되었습니다”


 증인 148명은 사건 당시를 떠올리며, 모두 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경찰 진압 초창기, 군중이 모인 무대 한복판을 향해 최루 가스가 발포될 때, 경찰의 사전 경고를 아무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음악이 잠시 멈췄고, 여느 콘서트에서도 그렇듯이 군중은 항의를 했습니다. 그 뒤, 군중으로부터 어린 Berurier Noir(80년대 얼터너티브 록 밴드) 음악이 아주 낮은 톤으로 들려왔습니다. 이때가 4시 15분경의 일입니다. 그리고 사전 경고도 없이, 최루 가스가 사방에 난사되었습니다.” 10여분이 흐르고, 동료와 함께 근처 음향장비를 트럭에 싣던 DJ가 경찰이 어떻게 축제 관객을 “폭격”했는지 증언한다. 


 또 다른 사람이 말한다. “사람들은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누군가 경찰에게 물건을 던지는 걸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건 경찰이 폭력 진압을 시작한 이후 벌어진 일입니다.” 모든 이는 “공포의 순간”, “겁에 질린” 사람, “길을 잃고”, “두려운” 상황에 대해 증언한다.


화학 가스 연기로 자욱한 윌송 거리


 동쪽 강변에서는 매우 빠르게 공포 분위기가 감돌았고, 최루 가스 연기가 자욱했다. 스피커는 20분 동안 꺼져있었다. 한 소년이 다가와서 “술과 가스 연기에 취해 의식을 잃은” 시민을 돕고 있었다. : “우리는 가스 연기에 휩싸였고, 어느 청년을 들것에 태워 호송해야했습니다. 최루 가스 연기가 계속해서 목구멍을 자극했습니다. 정말 부조리하고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이미 화학 가스 연기는 윌송 거리를 뒤덮었다. 논란이 되고 있는 내사부(IGPN) 보고서에 따르면, 그때가 4시 37분이었다. 경찰 입장에 따르면, 그때가 최루 가스 수류탄을 처음으로 발포한 시각이다. 그러나 사건 현장을 담은 영상과 <JDD> 인터뷰 증언에 따르면, 이미 4시 32분 이전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후자에 따르면, 경찰은 축제 참가자가 마치 “짐승”인 것 마냥, “강 상류에서부터 강변으로 몰려와서는, 루아르 강 쪽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도록, 대오를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벙커 건물 쪽에 있던 한 참가자가 말한다. “저는 경찰에 의해, 루아르 강 방향으로 폭력적인 토끼몰이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발등에 정확히 수류탄을 피격 당했습니다. 경찰은 저를 ‘더러운 혼혈 가우초’라 부르며 모욕했습니다.” 많은 사람은 화학 가스의 영향으로 구토를 했으며, 눈·목구멍·기관지에 고통을 호소한다.


"저는 눈물을 흘리며, 겨우 일어섰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른 채로, 불안하기만 했습니다. 저는 혼자였습니다."


 경찰 진압 작전의 위험성을 여실히 입증해주는 동시간대 또 다른 충격적 증언이 있다. 음악 축제는 오후 3시부터 본격 시작되었다. 서브우퍼가 있던 곳을 중심으로 가장 열광적인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거의 9시간 동안 “teuf(파티)”가 이어졌다. 새벽 4시 30분경, 술에 취했든 아니든, 너나 할 것 없이 심신이 지쳐버린 상태였다. “충돌 당시”, 벙커 건물 근처에 있던 청년이 상황을 설명한다. “지친 사람들은 여전히 무대 근처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일부는 잠에서 깨어나, 공황 상태에 빠졌고,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른 채로 황급히 달아나야했습니다.”


 몇 주 동안, 스티브의 친구들은 ‘침탈이 시작되었던 음향장비 근처에서, 피곤에 지친 스티브를 재웠다’고 말해왔다. 그들은 ‘스티브가 잠을 자던 도중, 화학 가스에 깜짝 놀라 달아나다가 강물에 빠졌다’고 확신했다. 어느 축제 참가자가 말했다. "저는 눈물을 흘리며, 겨우 일어섰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른 채로, 불안하기만 했습니다. 저는 혼자였습니다."


루아르 강에서의 20분


 어느 젊은 여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화학 가스 연기가 우리를 휘감았던 그 순간, 사람들이 루아르 강에 빠지는 걸 보았습니다.” 또 다른 이는 “정말 대혼란이었습니다. 경찰은 사람들을 눈여겨보며, 댄스 스테이지 한가운데까지 침탈했습니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강물에 빠지는 사람을 보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소송 원고 89명 중, 2명은 루아르 강에 빠졌던 사람이다. 한명은 최루 가스를 피해 달아나다가, 상황에 휩쓸려 균형을 잃었다. 다른 한명은 루아르 강 도크에 있던 밧줄에 매달렸다. 그 순간, 균형을 잃었던 사람이 거꾸로 넘어져, 그의 어깨를 지나쳐 강물에 떨어졌다. 수영을 할 수 없는 상태로 물속에서 허우적대던 그 사람을 옷깃으로 붙잡아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구조되기 전까지 약 20분 동안, 루아르 강에서 두려움에 떨어야했다.


 증인 148명 중 18명은 강물에 떨어지는 사람을 보았다고 진술했다. 4시 40분경, 화학 가스를 들이마신 한 여성이 숨을 고르기 위해 가장자리로 피신했다. 그녀가 말한다. “바로 그때, 사람들이 강물에 빠지는 걸 보았습니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루아르 강에 빠졌고, 다시 강둑으로 헤엄쳐오기 어려워보였습니다. 우리는 몇 명이서, 그녀가 깨어있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말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올 수 있도록, 조명을 비춰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인근에서 보트에 타고 있던 소방관에게 긴박한 상황을 알렸다. 그러나 그녀는 걱정스럽게 결론지었다. : “그 사람이 애초에 제대로 구조되었더라면, 저는 그렇게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목격하지도 않았겠죠.”


"우리가 경찰에게 가서 ‘저기 강물에 사람이 있다’고 말했는데, 우리는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일부는 경찰에게 구조를 호소했다. 증인이 주장한다. “우리가 경찰에게 가서 ‘저기 강물에 사람이 있다’고 말했는데, 우리는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경찰은 우리에게 ‘저리 가라, 아니면 체포하겠다!’라고 했습니다.” <JDD>가 인터뷰한 또 다른 사람은 구체적으로 당시 상황을 기억하며 이야기한다. “강가에 십 수 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강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경찰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 ‘그건 우리 일이 아니고, 소방관의 일이다.’ 세 번째는 누군가가 “기동대에게 ‘사람이 강물에 빠졌다’고 소리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라는 증언이다. 그에 따르면, 기동대가 “손전등을 들고 와서는 10초간 대충 살펴보았습니다. 심지어 제대로 된 위치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차를 타고 현장을 떠나버렸습니다.”


 소송 원고 89명 중 한 사람이 여전히 충격을 감추지 못한 가운데 증언한다. “상상해보십시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력을 다해 도망치고, 강물에서는 살려고 발버둥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최루 가스가 사방에 자욱하고, 수류탄이 폭발하고, 경찰은 사람들을 폭행했습니다.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낭트에서 만난 증인은 끝없이 진술한다. "우리는 모두 축제 분위기에 들떠있었습니다. 현장에서 행복하게 축제를 즐기고 있었는데, 빌어먹을 마지막 음악이 나올 때 쯤, 짭새가 우리를 침탈했습니다. 예, 그래서 저를 비롯한 사람들은 정말 화가 났습니다. 분위기는 어두워졌고, 우리는 분노를 감추지 않고 물병을 집어던졌습니다.” 경찰관 10명도 역시 폭력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발포자 2명이 사람들의 머리를 조준했습니다."


 이때, 벙커 건물에서 100미터 가량 떨어져있던 음향장비 담당자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화학 가스 연기를 헤치고, 경찰에게 물건을 집어던지는 축제 참가자에게 가서, 이를 그만두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경찰은 마침내 그에게 곤봉 폭행으로 응수했다. 어느 젊은 여성은 기동대 방패에 찍혀, 치아가 부러졌다고 한다. 관련 증언은 LBD 고무탄환 발포 장면을 떠올린다. "발포자 2명이 사람들의 머리에 LBD 고무탄환을 조준했습니다. 경찰은 루아르 강변 구석에 몰린 사람을 조준하고 있었습니다."


 관련 증언을 열심히 듣고 기록하지만, 당시 참가자들은 여전히 트라우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제 마음은 아직도 고통스럽습니다. 여태 살아오면서 여러 폭력과 무자비한 공격을 목격했지만, 이번 경우는 정말 터무니없었습니다. 경찰은 티셔츠를 입은 청소년을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폭행했습니다. 정말 끔찍했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심지어 ‘과도했다’라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을 정도로, 경찰의 폭력은 초현실적이었습니다.”


도발과 폭행


 강가를 따라 부두와 길이 갈라지는 큰 바위 근처에서 “파티”가 진행되었다. 그는 “등 뒤에서 테이저 건”으로 위협 당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에 따르면, 경찰의 위협은 그를 떠나게 하기보다는 자극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 당시, 그가 주위를 둘러봤을 때, 경찰 제복을 입은 한 남성이 전기 충격 권총을 손에 쥐고 협박했다. : “앞으로 가, 어서, 앞으로 가!”, 그가 말했다. “그 경찰은 제게 안으로 들어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뒤로 물러난 이후, 땅바닥에 쓰러져있던 사람을 도왔다. 그는 바위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 경찰은 도망치는 그를 붙잡아 곤봉으로 폭행했다. 


 결과 : 그는 발목 골절 진단을 받았다. 그는 원고 89명의 소송을 담당하는 변호사 Marianne Rostan에게 이번 주에 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지난 한 달이 넘도록 침묵을 지켰지만, 이제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했다. 소송을 제기할 기회와 계기가 없었을 뿐이다. 이로 인해, 소송 참여자는 총 90명이 될 것이다. 그 중에는 17살 고등학생도 있다. 처음엔 최루 가스 스프레이로 공격당했고, 이어서 곤봉으로 손을 심하게 폭행당했다. 결국, 오른쪽 집게손가락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ITT(L’Incapacite Totale de Travail. 총 노동력 상실) 3주 진단을 받았다.


"제 머리는 온통 피로 흥건했습니다. 저는 반쯤 넋이 나가있었습니다."


 가장 폭력적이었던 상황 중 한 가지는 바로 이 젊은 소송참여자의 이야기이다. 그는 화학 가스 연기로부터 도망치던 순간에 대해 증언했다. 그는 루아르 강변으로 달아나지 않고, 경찰 부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그가 말한다. 그는 사건 현장을 담은 영상에서 살짝 등장하는 사람이 본인이라고 확신한다. 땅바닥에 쓰러져 폭행당하는 장면이다. “기동대는 제 머리를 발로 찼습니다. 저는 땅바닥에 쓰러졌고, 수차례 곤봉으로 폭행당했습니다.” 군홧발과 방패로 수차례 짓밟힌 뒤, 그 청년은 마침내 자리에서 겨우 일어났다. 그렇게 도망친 다음, 그는 친구들이 부축해주던 상황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기억”이 전혀 없다.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그가 말한다. “제 머리는 온통 피로 흥건했습니다. 저는 반쯤 넋이 나가있었습니다.”


 상황이 조금 진정되던 새벽 5시쯤, “돌아가던 길에, 한 축제 참가자가” 기동대에게 “도대체 무슨 이유로” 침탈했는지 물었다.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 청년은 자신의 의문점을 새롭게 풀고자 모험을 감행한다. “30cm도 안 되는 거리에서,” 눈에 화학 가스 스프레이를 맞은 청년은 방향감각을 상실하여, 잠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때, 기동대가 제게 ‘저리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동대를 볼 수 없었습니다. 기동대는 저를 밀쳤습니다. 저는 겨우 눈을 떴고, 기동대는 우연히 저의 다른 쪽 눈을 쳐다봤습니다.” 야만적인 기동대는 또다시 그를 곤봉으로 폭행했다. 그를 구하러 왔던 친구도 무릎을 꿇고 고초를 겪어야했다. 그가 슬픔에 잠겨 말한다. "다음날이 되자, 얼굴이 완전 타들어갈 듯이 매우 따가웠고, 며칠 동안 계속 고통스러웠습니다. 번듯하게 일하러 갈수도 없을 정도로,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이 청년은 당시를 떠올리며, 일반적인 느낌을 설명한다. “우리는 그저 깔아뭉개야할 공격 대상이었습니다.”


 마지막 증언은 특히나 문제적이다. 4시 30분경, 동료와 함께 음향장비를 철수하고 있던 DJ의 증언이다. 그 DJ는 벙커 건물 반대편에 있었다. “군중과 뒤섞인 경찰이 말 그대로 우리 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DJ는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증언한다. : “저는 축제가 끝나기 불과 몇 분전까지도, 이 행사가 무사히 진행될 수 있도록, 경찰이 우리를 축하하려고 온 줄로만 알았습니다.”


* Source (출처) :

http://nantes-revoltee.com/fete-de-la-musique-nouvelles-revelations/


* 참고 기사 :

https://emmanuelmacrondemission.tistory.com/search/스티브

posted by macronde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