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조끼처럼, SNCF(철도공사)의 민영 자회사 Geodis 노동자들도 고용주와 경찰의 강도 높은 탄압을 견디며 투쟁하고 있다. ‘활동가 연구 플랫폼(PEM)’의 기사를 보자. 


 투쟁 사례를 재조명함으로써, 노란 조끼 운동은 노동조합 운동에 의문을 제기하며, 자극을 준다. 그러나 회사에 다니는 많은 활동가들도 주저 없이 조끼를 입고, 계속되는 봉기에 꼬박 참여해왔다. 아래는 철도공사 민영 자회사에서 근무하는 CGT 조합원이자 초창기부터 노란 조끼였던, Gennevilliers의 Geodis 노동자들의 사례이다. 로터리에서와 같이, 각 회사에서도 결집을 위한 주체를 세우고 공동 세력을 조직해나가는 그들의 운동 경험은 상호 상승작용과 진행되어온 공동 투쟁의 정교화를 설명해준다. 



활동가 연구 플랫폼(역자 주 1)에 게시된 기사이다.


 PEM : 당신에게 노란 조끼는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시위에 언제 참여하셨나요? 봉기의 시작을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S : 11월 17일 첫날, 저는 TV에서 노란 조끼를 지켜봤습니다. 그때, 우리는 노란 조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느꼈습니다. 우리는 로터리에서 사람들이 결집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곳은 다양한 교류의 장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투쟁이 구매력, 기름 값(유류세), 세금, 좀 더 나은 임금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있어, 우리는 변화 단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노동조합들이 시위 동참을 촉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부문과 토론하고, SUD(역자 주 2)와 같은 다른 노동조합과 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3차 행동이 있던 토요일, 저는 딸의 수영 고글을 챙겨, 다른 지역 친구들과 함께 투쟁하러 갔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조직돼있진 않았지만, 교외 지역 주민들이 현장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Saint-Lazare(역자 주 3)에 갔고, 솔직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느 곳에나 노란 조끼가 있었습니다! 남녀노소 모두가 있었습니다. ... 특정 지역만이 아니라, 모든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와있었습니다. 샹젤리제에서는 경찰이 통행을 차단했습니다. 우리는 쓰레기통이 불타는 것을 보았고, 최루 가스 연기를 뒤집어쓰기도 했습니다. 작은 골목길 주변에서는 짱돌이 날아다녔습니다. 바리케이드가 있었고, 자동차가 불탔습니다. 사람들은 경찰에 의해 부상을 당했습니다. 경찰은 모두를 쫓고 있었고, 사람들은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 그들은 움직였지만, 우리는 8구역에서 한 군데 모여 있었습니다. 정말 놀랍고도 충격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겪었던 그 전후의 상황을 앞으로도 절대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샤워를 하려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도처에서 최루 가스가 발포되었고, 불이 타올랐습니다. ... 그러나 저는 그 현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한 가지 작은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저는 여하튼 많은 곳이 불탔기 때문에, 동료들을 불러 모아 함께하기가 조금은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K는 정말 열정적이었고, 페이스북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함께 투쟁하러 갔습니다.


 K : 제가 처음으로 참여했던 건 1월 둘째 주였습니다. 솔직히 완전 최고였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CGT와 함께 많은 시위를 해왔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새로운 세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슬로건도 있었습니다. “마크롱 사퇴(Macron Demission)”, “우리는 여기 있다.(On est la)” 우리는 노란 조끼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노동조합이 없는 사람들이고, 뜨거운 가슴으로 함께하는 사람들입니다. 대중적으로 터져 나오는 분노입니다.


 격렬한 시위였습니다. 우리는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최루 가스에 고초를 겪었습니다. 경찰특공대(BAC)는 모든 사람을 거칠게 몰아붙였고, 사람들은 계속 부상당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투쟁하러 가야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행했던 모든 만행은 마크롱의 법 때문에 더욱 활개 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노동조합을 죽이고, 더 이상 노동조합이 전혀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노란 조끼는 불과 3~4개월 만에 많은 것을 바꿔냈습니다. 꿈만 같았습니다! 솔직히 정말로 꿈만 같았습니다!


 S : 노란 조끼가 일으킨 신선한 돌풍이었습니다. 


 K : 우리는 투쟁하고 있지만, 평일에는 대부분 직장에 있습니다. 심지어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사람들은 계속 일하고 있습니다. 시위가 진행되는 동안 상점이 문을 닫기 시작했고, 그 외에도 여러 봉쇄투쟁들이 있었습니다. 노란 조끼는 앞뒤 재며 계산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최전선에 있습니다. 심지어 위험에 처했을 때조차, 그들은 전진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현장에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매우 걱정스러워하며, “조심하세요. 저기 극우파가 있어요. 그렇게 하시면 안돼요.”라고 이야기합니다. 노란 조끼는 여전히 최전선에 있습니다. 그들은 (극우파 따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특히 여성들도 말입니다. 현장에는 또한 수많은 여성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S : 제게 닥친 현실은 비참하지만, 그것은 저뿐만 아니라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홈리스, 실업자, 체제로부터 배제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란 조끼 운동은 이러한 사실을 명징하게 드러냈고, 우리는 많은 연결고리를 직조해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여성, 청년, 노인 등 남녀노소 모두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여성들이 주도하는 운동이 있는 한, 우리는 무언가 쟁취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남성들도 투쟁에 나서고, 상황을 잘 이끌지만, 운동에 참여하는 수많은 여성들과는 또 다릅니다.



 PEM : 그리고 지역별 노란 조끼 총회와 수많은 직접행동이 있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들리는 바로는 “작전”이 있는 것 같은데요. 투쟁 국면에서 어쩌면 시위 이상으로, ‘상호협력’이 아주 구체화되는 순간이 있는데, 지금이 그런 순간을 뜻하는 것인가요?


 K : 처음에 저는 지역 노란 조끼 총회에 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노동조합원이며, 저와 노동조합원들은 노란 조끼를 지지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당신은 이 현장에 참여하면 안 된다. 당신이 할 일을 하라. (노동조합) 중앙은 당신의 입장에 동조하지 않는다. ...’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해명을 했고, 이제는 괜찮습니다. 특히 우리가 노란 조끼들과 함께 여러 행동, 봉쇄투쟁, 지역 총회에 참여하고 난 이후에 말입니다. 지금, 우리들 사이엔 두터운 신뢰관계가 있습니다.


 S : 저는 처음 열렸던 Rungis 지역 노란 조끼 총회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 총회는 극우파로 인해 엉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극우파들은 우리가 정치를 해선 안 된다고 하며, 모두가 평등하다고 주장했습니다. ... 그러나 그들은 곧장 쫓겨났습니다. 일반적으로, 노동조합주의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이야기되지 않았습니다. : 공통의 사안이 있었고, 주요 의제는 조직화 방안이었습니다. 그래서 ‘봉쇄투쟁’이라는 것이 등장했습니다!


 K : 그렇습니다. 노란 조끼와 함께 했던 봉쇄투쟁! 정말 대단했습니다! 우리는 5~6차례 봉쇄투쟁을 진행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더 많이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첫 번째 봉쇄 투쟁은 12월 14일 Gennevilliers 항구였습니다. 그곳엔 모든 이들이 있었습니다. : 우편 노동자, 학생, 노란 조끼, 우리들... 우리는 항구 곳곳을 누볐습니다. 정유소 봉쇄 1회를 포함하여, 항구 봉쇄투쟁은 세 차례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2월 5일에는 CGT와 노란 조끼가 함께 Rungis 지역에서 거대한 봉쇄투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 투쟁에는 미등록 이주민들도 함께했습니다. 모든 인종들이 함께했습니다. 여러 진입로가 3~4시간동안 봉쇄되었습니다. 그 당시 모였던 인원을 보았을 때,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 “우와, 이게 뭔 일이래?!” 정말 멋진 봉쇄투쟁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Rungis 노란 조끼 공동체(참고 기사 1)와도 함께 있었습니다.



 PEM  : 오두막집(거점농성), 무료 톨게이트(봉쇄 이후 무료 통과)와 같이, 투쟁의 방식 역시 우리가 노동조합 운동에서 평소에 보던 모습과 조금 달랐습니다. 이러한 투쟁 방식은 어떻게 나타났고, 상호 교차된 것인가요?


 K : 저는 톨게이트 봉쇄투쟁은 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철도노동자들은 2018년 파업투쟁 당시, 톨게이트 봉쇄를 했었습니다. 여하튼, 우리는 노란 조끼와 함께 30~40유로 티켓을 지불해야하는 대형 톨게이트에서 투쟁을 벌였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최소 2시간을 머물렀습니다. 전략은 잘 짜였습니다. :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십시오. 그러면 톨게이트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바로, 돈입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 톨게이트에 있던 통제선을 없애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본 뒤에, 저도 역시 시작했습니다. 톨게이트 운영 당국은 그날 많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가는 자동차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 “이리로 오세요. 무료입니다.” 경찰이 다가왔지만, 쪽수는 우리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저는 경찰에게 말했습니다. “저리 가세요!”


 우리는 또한 각 동네에서 플라스틱 조각으로 직접행동을 했습니다. [그것은 도시 시설물, 거리 가구 등에 수류탄, 탄환 발포에 대한 우리의 규탄 입장과 주장을 넓게 편 플라스틱 조각에 써서 붙이는 형식입니다.] 우리는 2015년 파업 투쟁 당시, 물류창고 앞에 그리고 포장상자 안에다가 이러한 방식(참고 기사 2)의 투쟁을 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노란 조끼와 함께 도시에서 (또다시 그러한) 투쟁을 했던 것입니다. “마크롱 사퇴”, “투쟁하는 노란 조끼”라는 문구를 새겼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고속도로, 다리, 항구에서 이러한 투쟁을 했습니다. Gennevilliers 항구를 지나가던 경찰들이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행운을 빌어요!”


 그리고 지난 5월, 우리는 노란 조끼들의 오두막집을 건설했습니다. 각종 장비와 판자를 가져와 3~5미터의 거대한 오두막집을 건설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데려왔습니다. 저는 딸을 데려왔습니다. 그곳에는 아이들을 위한 작은 오두막집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뛰놀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딸이 제게 말합니다. : “아빠, 우리 그때 그 노란 조끼 오두막집 다시 만들래요?” 오두막집이 파괴당했을 때, 저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저는 정말로 울음이 터졌었습니다. 그곳은 모두가 올 수 있고, 모두가 함께 지었던 공간이었습니다. 그곳은 수많은 연결고리를 만들어준 공간이었습니다. 오두막집은 사라졌지만 남은 이들은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PEM : 노동조합원들에게, 처음에 노란 조끼 운동은 ‘요구사항’ 측면에서 그리 분명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그렇죠?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를 받아들이는 걸 주저했었나요? 임금이나 노동 조건 같은 의제들을 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 


 S : ‘구매력’ 의제가 있었습니다! 루도스키(Ludowski)의 청원을 보시죠. : 디젤 유류세와 세금 문제가 있었고, 이후 임금 인상 문제를 비롯해 여러 핵심 의제들이 있었습니다. “매달 15일까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라는 구호가 있습니다. 이 구호가 모든 걸 말해줍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게 있습니다. : “나는 노동하지만, 여전히 빈곤하다.” 어떻습니까, 이런 사회에서 임금 생활자나 불안정 노동자들이 월말까지 잘 버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분노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름 값과 관련해 오랜 역사적 요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2년 전, 교통비는 월 4.9유로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일하러 가는데, 디젤 값이 너무 비싸다. 고용주가 일정 부분 감당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Navigo Pass를 살 수 있도록, 적어도 35유로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는 현재 핵심적 요구입니다. 우리 회사엔 북부 프랑스, Oise, 심지어 Seine-Maritime 등 멀리서부터 출근하는 직원들이 많기 때문에, 이는 지극히 정당한 요구입니다. 이들은 한 달에 약 170, 180유로를 통근비용으로 지출합니다.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렇게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언론에서는 우파 놈들 이야기만 해댔습니다! 우리는 직접 현장에 가서 봐야만 했습니다. 시위 현장에서, 우리는 CGT, SUD, FO(역자 주 4)의 여러 가맹 단위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놀라웠던 점은 제가 CFDT(역자 주 5) 조합원들까지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와, 당신은 이를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제가 그들을 보았을 때, 저는 “CFDT가 왔다고?!”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노란 조끼 시위에 합류할 때에는 현수막이나 깃발을 들고 오진 않았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2016년 노동법 개악 반대투쟁 당시, TV를 통해 우리를 지켜봤던 많은 사람들 역시 노란 조끼입니다. 일부는 관객으로 남았지만, 지금 현재 그들은 (투쟁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투쟁 이후, 그들은 당연히 자연스레 권리를 지키고, 스스로를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입니다. (권력과 자본의) 탄압이 어땠는지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PEM : 운동이 어떻게 자연스레 반향을 일으켰을까요? 회사에서 일하는 노란 조끼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일까요? 매 주말마다 집중적인 결집, 그리고 월요일엔 다시 일하러 돌아가는 것을?


 K : 매주 토요일 그리고 월요일, 그 끔찍한 회사에 다시 일하러 돌아오면, 사람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휴게실에는 TV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주말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언론이 진실을 보도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이미 상황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크롱이 중대 발표를 하던 그날 밤, 휴게실은 사람들로 가득 찼었습니다!


 S : 우리는 12월 26일에 파업투쟁(참고 기사 3)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물류 창고 쪽 동지들이 거대하게 합류했습니다. 그 직후를 제외하고는, 관리자들이 물량을 모두 다른 물류창고로 빼돌려서, 도크(부둣가)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휴전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뒤늦은 후회이지만, 저는 당시 그 파업투쟁이 너무 순진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2015년 투쟁에서 했던 것처럼, (대체인력을 저지하고) 물량을 사수하기 위해, 물류창고를 봉쇄했었어야 합니다.


 K : 그 대신에, 우리는 빼돌려진 물량이 적재되어있던 95, 94, 92번 물류창고를 봉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투쟁을 노란 조끼와 함께 했습니다! Bonneuil-en-France 지역에서 벌어졌던 첫 봉쇄투쟁은 모두 노란 조끼와 함께 진행한 것입니다.(참고기사 4) 거대한 영향력을 끼쳤고, 적어도 300대의 트럭을 봉쇄했습니다. 그러나 전체 운동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함께하는 투쟁을 조직해야했습니다. 관리자들은 단단히 화가 났었습니다! “이런 젠장맞을 노란 조끼들, 쓰레기 같은 놈들!”이라고 말했습니다. 한 관리자는 “뭐라고? Geodis뿐만 아니라 노란 조끼들이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자리를 떠나버립니다. 


 지난 5월, Bonneuil 두 번째 봉쇄투쟁에서 경찰은 Rungis 노란 조끼 공동체의 여성 동지 한명을 체포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동지를 구출하고자 달려갔고, 팔다리 등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로, 우리가 Gennevilliers 경찰서에 소환되었을 때, 우리를 지지하기 위해 노란 조끼 동지들이 경찰서 앞 집회를 열어주었습니다. 그때, 저는 정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S : 게다가, 어느 시점부터 관리자들은 현장에서 노란 안전 조끼를 입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GEODIS 회사에서 일하는 노란 조끼 동지들과 함께 시위를 하러 나갔습니다! 또한, “나는 붉은 조끼지만, 노란 조끼이기도 하다.”라는 인식이 생기도록, CGT를 추동했습니다. 노란 조끼 운동이 서민층, 중산층, 어디서든 배제된 그 모든 사람들을 위한 운동이라는 걸 우리가 깨달았을 때, 우리는 정말로 열심히 투쟁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이들에게 파업투쟁을 적극적으로 선동했습니다. 그리고 일부 기층 단위와 함께, 실제로 첫 파업투쟁을 감행했습니다.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분노의 화살을 회사에게로 돌렸습니다. 더 이상 정부와 직장 상사에게 굴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효과는 그리 크진 않았고, 미미했습니다.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조직해나갔다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쟁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1936년(역자 주 6)이나 1968년처럼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 운동은 6개월 이상 지속되어왔고, 모든 세대에 걸쳐 흔적을 남길 것입니다. 무언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PEM : 또한, 노란 조끼 운동과 여러분들의 물류창고 투쟁 모두에서, 언제나 폭압적인 진압 국면이 있어왔습니다. 국가와 고용주의 폭력적 대응에 맞서, 앞으로의 상황을 어떻게 전망하시나요?


 K : 지난 2년간 자연스레 수많은 일상적 탄압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이는 노란 조끼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들은 정리해고, 경찰 소환 등으로 두려움을 심어주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 노란 조끼들은 그게 얼마나 더 폭압적일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총회에서 팔을 절단당하거나 눈을 실명당한 부상자들을 보았습니다. 정말 끔찍한 재앙입니다. 부상에 대해 이야기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는 저를 더욱 더 분노에 차도록 만듭니다.


 S : 저는 부상자들, 곤봉으로 폭행당한 이들을 봤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3차례 부상당했었습니다. 특히 플래시볼에 피격당해 부상당했었습니다. 전쟁이었습니다. 우리는 시위를 하러 파리에 가고, 저들은 우리를 상대로 전쟁을 벌입니다. 실제로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고, 흉터를 남깁니다. 그러나 우리 동지들, 우리는 강인한 투사입니다! 저들이 세차게 몰아칠수록, 우리 역시 더욱 더 당차게 결의합니다!


 우리에게 언젠가는 두 번째 기회가 찾아올 것입니다.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합니다. 그리고 다가올 그 순간은 기업과 경제 체제를 향할 수도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 상상할 수조차 없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엿 같은 체제, 지긋지긋한 것들 ... 저들은 궁지에 몰려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저들은 위험을 감수할 것입니다. 한 달, ‘1개월’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한 달이란... ! 정부는 굴복하고 말 것입니다. 고용주들도 굴복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까지, 지금처럼 항상 당하고만 살아야겠습니까? (한 달) 1,200유로를 위해 개처럼 노동할 수는 없습니다!



* Source (출처) :

https://paris-luttes.info/blocage-peage-greve-sauvage-geodis-12380


* 역자 주 1 : 

http://www.platenqmil.com/blog/2019/07/02/blocage-peage-greve-sauvage--geodis-en-gilet-jaune


* 역자 주 2 : SUD는 연대·단결·민주(Solidaires Unitaires Démocratiques)의 약자로, 프랑스의 솔리데르(연대노총) 가맹 노동조합이다. 최대 좌파노총 CGT보다도 급진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 역자 주 3 : 생 나제르(Saint-Nazaire) 조선소 노동자들의 노란 조끼 선언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3&document_srl=336414


* 역자 주 4 : FO는 노동자-힘(Force-Ouvriere)의 약자로, 프랑스의 제3노총이다. 제1노총 CGT와 비교했을 때, FO는 상대적으로 온건, 보수, 실리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노사협조주의적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 역자 주 5 : CFDT는 민주노동총동맹(Confédération Française Démocratique du Travail)의 약자로, 프랑스의 제2노총이다. CFTC(기독교노동총동맹)에서 분리해 나왔으며, 전통적으로 프랑스 사회당과 가깝다. 프랑스 공산당과 가까운 최대 좌파노총 CGT보다, 상대적으로 온건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위 대목은 평소, 투쟁에 잘 나서지 않던 노동조합까지 참여한 모습에 의아하고 놀랐다는 맥락이다.


* 역자 주 6 : 1936년 5월, 노동절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프랑스의 어느 공장에서 노동자 5명이 해고된 것을 시발점으로 벌어졌던 대중파업. 인민전선 운동과도 연관되어 있었으며, 5~6월 폭발적인 공장점거 운동이 벌어져, 정부와 CGT는 그 유명한 ‘마티뇽 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인민전선의 ‘포로’였던 프랑스 공산당과 CGT는 그 이후, 파업투쟁을 배신하며 역사적 오점을 남겼다. 이 기간, 약 15,000건의 공장 점거투쟁, 200만 명의 대중파업이 벌어졌으며, ‘총동맹’과 정부의 직접교섭, 주 40시간 노동, 1년에 2주일 이상 유급휴가 명문화 등을 쟁취했다. 여름휴가를 뜻하는 프랑스 단어 ‘바캉스(vacance)’도 바로 1936년 대중파업 이후 맺어진 마티뇽 협정에서 유래한다.


* 참고 기사 1 :

“정말 오랫동안 무심코 기대해왔던 운동” - ‘Rungis 노란 조끼 공동체’ 회원 3명과의 인터뷰 노트. 5월 16일자 ACTA 인터뷰 기사 번역

https://emmanuelmacrondemission.tistory.com/208


* 참고 기사 2 : Geodis, c’est dégueulasse !, 18 Avril 2018

http://www.platenqmil.com/blog/2018/04/18/geodis-cest-degueulasse


* 참고 기사 3 : La bataille du flux : récit de grève chez Geodis Genneviliers, 15 Janvier 2019

http://www.platenqmil.com/blog/2019/01/15/la-bataille-du-flux--recit-de-greve-chez-geodis-genneviliers


* 참고 기사 4 : Blocage de Bonneuil - alliance Gilets Jaunes et ouvriers de la logistique !, 17 Janvier 2019

https://paris-luttes.info/blocage-de-bonneuil-alliance-11512

posted by macronde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