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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3] 2019년 4월 18일자 AFP의 부상자 인터뷰 번역 "프랑스 시위에서 실명을 당한 이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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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는 최근 몇 달간 프랑스 ‘노란 조끼’ 시위에서 경찰이 발포한 고무탄이나 다른 발사체로 인해, 실명을 당한 십 수 명 이상의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프랑스 언론인 David Dufresne의 블로그와 투쟁 단체 ‘Désarmons-les(저들을 무장해제 시키자!)’에 따르면, 2018년 11월 운동이 터져 나온 이후로 23명이 실명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그들 중 15명은 AFP와 인터뷰했고, 8명은 거부했다. - 세부 사항은 아래 도표에 회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파란색 이름을 클릭하라.
일부는 자랑스러운 노란 조끼이며, 다른 이들은 단순히 행인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파리, 보르도, 툴루즈, 프랑스령 인도양의 레위니옹 섬과 같이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부상을 당했다. 가장 어린 희생자는 14세, 15세, 17세이며, 가장 나이가 많은 희생자는 59세이다.
몇 가지 사례는 프랑스에서 LBD로 알려진 대형 고무탄을 발포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고무탄 사용은 정당과 시민 권익 단체의 비판을 받아왔다.
2019년 4월 4일, 내무부 장관 크리스토퍼 카스타너는 프랑스 보안국이 노란 조끼 시위대에 대한 경찰 폭력 의심 사건 209건을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국은 프랑스 전역에서 도시 거리를 가득 메운 수천 명의 시위대를 목격했던 혼란스러운 몇 달 동안, 경찰의 행위를 옹호해왔다.
카스타너는 시위대에 의해 1,628명의 경찰과 특공대도 역시 일부 중상 포함, 부상을 당했다고 밝혔다.
AFP에 따르면, 부상자 중 14명은 시력 손상 혹은 안구 손상을 확정하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다른 2명은 실명이 예상된다. 그리고 적어도 1명은 안구가 아직 남아있어서, 부상 정도가 쉽게 보이지 않는다.
법적 조치를 취한 49세 Patrice는 그의 부상이 소위 “비살상무기에 맞서 투쟁할 수 있는 디딤돌”이라고 본다. 다른 이들은 집에서 “두더지처럼”, 어둠 속에서 지내고 있다. “나는 차라리 징역 10년을 선고받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라고 Alexandre가 말했다. 한 사람은 자살시도를 했었다고 AFP에 말했다.
David BREIDENSTEIN : 40세, 2019년 3월 16일 파리에서 부상당함.
“벽돌이 날아와 여러분의 머리에 박혔다고 생각해보세요.”
당신은 왜 그곳에 있었나요?
약 40명이었던 우리는 파리행 기차를 잡아탔습니다. 최소 7번 이상 참가했었고, 저는 시위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부터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노란 조끼를 입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우리는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을 때, 개선문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몇몇 시위대와 함께 그 일대를 벗어났습니다. 그 다음, 경찰은 대오를 분산시키기 위해 탄환을 발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고개를 돌리면서 걷기 시작했고, 바로 그때 피격을 당했습니다. 그 힘은 터무니없이 거대했습니다. 벽돌이 날아와 여러분의 머리에 박혔다고 생각해보세요. 저는 땅바닥에 쓰러졌습니다. 저는 그저 담배를 피우며, 노란 조끼를 입고 그곳에 있었을 뿐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저는 표적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평범하게 걷고 있었을 뿐, 달리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당신의 삶은 어떤가요?
저는 에어버스 부품을 만드는 연마 공장에서 근무합니다. 우리는 기계를 관리, 감독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실명을 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현재 집에 있습니다. 저는 그저 문을 닫아놓고 집에 있을 뿐입니다. 심지어 약간의 햇빛이나 TV 화면의 불빛조차, 제 눈을 아프게 합니다. 매우 피곤합니다.
인터뷰어 Remi Banet에 따르면, David Breidenstein는 소송을 제기했다. David Breidenstein는 2019년 3월 16일 파리에서 부상을 당했다. 그로부터 4일 후, AFP는 파리 Cochin 병원에서 그를 인터뷰했다.
Franck DIDRON : 20세, 2018년 12월 1일 파리에서 부상당함.
“그들은 제 삶을 파괴했습니다.”
당신은 왜 그곳에 있었나요?
저는 겨우 먹고 살기도, 정말 힘들었기 때문에 노란 조끼에 동참했습니다. 12월 1일, 저는 처음으로 행진을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저는 평화로운 시위 행렬에 있었고, 우리는 경찰에게 포위당했었습니다. 제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어머니가 뉴스에서 상황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보셨고,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저는 괜찮은 상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다음 한 노란 조끼가 제게 말했습니다. “조심해요, 진압 경찰이 밀려오고 있어요.” 저는 좌우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을 때, 고무탄에 피격을 당했습니다.
지금 당신의 삶은 어떤가요?
그때 이후로, 저는 경찰관이 왜 저를 피격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 정당성은 대체 어디에 있었는가?’ 저는 그 경찰관이 앞으로 나와서, 제 눈을 보고, 대체 왜 그랬는지 설명해주길 바랍니다. 그는 제 삶을 망쳤습니다. 지금 제게 가장 어려운 일은 제가 물 한잔을 마실 때, 그 거리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저는 모든 것을 다시 배워야만 합니다. 저는 부상을 당하기 전에, 조경 정원사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인터뷰어 Sami Acef에 따르면, Franck Didron는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그의 변호사에 따르면, 이 사건을 경찰 징계 기관에 제소했다. AFP는 2019년 2월 2일 파리, 부상자들의 행진에서 Franck Didron을 만났다. 그리고 2019년 2월 11일 파리에서 또다시 만났다.
Alexandre FREY : 37세, 2018년 12월 8일 파리에서 부상당함.
“저는 차라리 징역 10년을 선고받는 것이 더 나았습니다.”
당신은 왜 그곳에 있었나요?
아버지로서, 저는 이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심각하게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습니다. 저는 분노를 표현하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싸우고 싶었습니다. 그때 저는 파리에서 두 번째로 시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파리는 수도이기 때문에 상징적인 곳입니다. 저는 시위를 주도하진 않았지만,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행렬에서 앞장섰습니다. 그들은 확실하게 제가 일종의 지도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우리는 10시경 샹젤리제로 떠났습니다. 우리가 세느강을 건너자마자, 저는 무언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습니다. 우리는 쥐덫처럼 전 방향에서 고착 당했습니다. 곳곳에서 발포가 이어졌고, 화염이 피어올랐습니다. 전쟁이었습니다. 그 순간, 제 친구는 다리에 피격을 당했습니다. 저는 그와 어깨동무를 하며, 친구를 안심시켰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다시 겨냥했습니다. 바로 그때 무언가 제 눈을 타격했고 눈알, 눈구멍, 망막 등 모든 것을 박살냈습니다. 저는 땅바닥에 쓰러지진 않았지만, 친구들이 제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네 눈이 사라졌어, 네 눈이 사라졌다고!’
그날, 경찰들은 올바르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우리보다 그들이 더 두려워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유리창을 부수지도, 경찰관을 폭행하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제가 상점 유리창을 부수었다고 해도, 그런 대우를 받을만한 일은 아닙니다.
지금 당신의 삶은 어떤가요?
저는 37살이고, 제 삶은 망가졌습니다. 저는 차라리 징역 10년을 선고받는 것이 더 나았습니다. 그들은 제게 최대한 모든 배상을 해야 하지만, 그 책임을 제게 떠넘겼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이후, 제 얼굴에는 흉터가 남았습니다. 저는 다시 일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벤트 매니저입니다. 선물을 잘해야 하는 직업입니다. 저는 새로운 삶에 적응해야할 것입니다. 저는 걷기도 어렵습니다. 심지어 운전이나 수영 등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경찰에게 분노하는 것이 아닙니다. ... 저는 그저 그들에게 그렇게 끔찍한 짓을 하도록 명령한 정치인들에게 분노합니다.
저는 여전히 노란조끼입니다. 로터리에 우뚝 서있는 이 사람들은 여전히 대단합니다. 저를 돕기 위해, 작고 늙은 여성들이 제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들은 한 달에 고작 600유로를 벌지만, 저를 돕기 위해 10유로를 기부합니다.
인터뷰어 Elia Vaissiere와 Thomas Bernardi에 따르면, Alexandre Frey는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경찰 징계 기관은 조사를 진행 중이다. 37세 Alexandre Frey는 2018년 12월 8일 파리에서 고무탄에 오른쪽 눈을 실명당한 이후, 그의 삶이 망가졌다고 말한다. 그는 북부 프랑스 Vendeuil-Caply에 살며, 문화 영역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그는 현재 TV에서 노란 조끼 시위를 지켜보며, 언젠가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AFP는 2019년 3월 13일 그를 인터뷰했다.
Patrick GALLIAND : 59세, 2018년 11월 24일 파리에서 부상당함.
“여러분은 정치인과 경찰들에게 매우 빨리 화가 날 것입니다.”
당신은 왜 그곳에 있었나요?
저는 우리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몇몇 친구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사람들은 노래하며 외치고 있었습니다. ... 특별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최루 가스가 발포되었고, 진압 경찰이 밀려왔습니다. 우리는 아비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 근처 길가로 이동했습니다. 그 이후 어느 순간, 우리는 “그들이 밀려오고 있다! 그들이 밀려오고 있다고!” 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매우 크게 ‘쾅’하는 소리를 들었고, 머리와 눈에 충격을 느꼈습니다. 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지금 당신의 삶은 어떤가요?
먼저, 여러분은 믿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여러분은 정치인과 경찰들에게 매우 빨리 화가 날 것입니다. 고용주가 저를 지지해주었기 때문에, 저는 운이 좋은 편에 속합니다. 저는 지붕 위로 올라가는 일과 연관된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발을 어디에 디디고 있는지, 보지 못할 수도 있는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 멀쩡한 눈에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저는 항상 고글을 착용합니다. 그게 다입니다. 저는 실명했습니다. 저는 부상자들을 위한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하는 것이 제게 중요했지만, 그것은 어려운 경험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폭죽을 터트리고 있었습니다. 폭발음이 들릴 때마다, 저는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인터뷰어 Alexandra Del Peral와 Tiphaine Honore에 따르면, Patrick Galliand는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경찰 징계 기관은 조사를 진행 중이다. AFP는 2019년 3월 22일, 파리 교외지 Morsang-sur-Orge에 있는 59세 Patrick Galliand의 집에서, 그를 만났다.
Vanessa LANGARD : 34세, 2018년 12월 15일 파리에서 부상당함.
“저는 더 이상 스스로가 제 자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당신은 왜 그곳에 있었나요?
저는 할머니를 돌보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이 아파트에서 저와 함께 살고 계십니다. 제가 시위했던 가장 큰 이유는 노인 정책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정부로부터 380유로를 받고, 나머지는 가족의 도움을 받습니다. 마크롱은 ‘게으름뱅이’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저는 ‘유리 세공’이라는 직업과 함께 부업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게으름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이전 뉴스에서 제가 봤던 것들과 다르게, 당시에는 매우 평화로운 시위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놀랐습니다. ... 우리는 진압 경찰 벽을 우연히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사복 경찰이 다가왔고, 발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피격을 당했습니다. 제 친한 친구가 “펑! 펑!” 소리를 들었고,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검은 물체가 땅바닥에 떨어졌고, 그래서 그녀는 그것이 최루 가스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제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땅바닥에서 제 머리가 찢어진 채로 열려있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뼈를 볼 수 있었습니다. 제 친구는 큰 충격을 받아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제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날, 어떤 위험한 것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방향으로 가기 위해, 서로 손을 맞잡고 그곳에 머물렀던 4명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들은 어떤 위협도 가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고함치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물건을 집어던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신의 삶은 어떤가요?
저는 두 차례 병원에 입원했었습니다. 한번은 뇌출혈이 있었고, 그 다음 세 개의 금속판을 머리에 삽입해야했습니다. 병원에서 제 눈을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알아차릴 수 없는 장애도 생겼습니다. 제게 두통과 피로감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겉으로는 건강해보이기 때문에, 왜 지쳐있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는 더 이상 스스로가 제 자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제 자신을 가꾸곤 했었고, 외출 준비를 하고 화장을 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제 삶은 하루하루가 싸움의 연속입니다. 저는 1년 간 재활 치료를 받아야만 합니다.
인터뷰어 Guillaume Daudin와 Tiphaine Honore에 따르면, Vanessa Langard는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경찰 징계 기관은 조사를 진행 중이다. "저는 더 이상 스스로가 제 자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2019년 3월 19일 파리 인근 Plessis-Trevise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AFP에게 Vanessa Langard가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그녀는 노란 조끼 시위에서 고무탄에 피격당한 이후, 새로운 난관에 적응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녀의 얼굴 위 흉터가 유일한 가시적인 부상이지만, 여전히 손상되진 않은 그녀의 왼쪽 눈은 거의 실명 상태이다.
* 원문 출처 :
https://factcheck.afp.com/life-after-losing-eye-french-protests
* 참고 자료 1 : 이 링크에 가면 경찰 폭력에 의한 부상자에 대한 상황 설명과 사진, 관련 뉴스 기사(해당 사진이나 링크 클릭) 등을 볼 수 있음. 아카이빙 게시물이기 때문에 운동 시작부터 현재까지의 부상자 상황이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고 있음.
* 참고 자료 2 :
6월 21일 현재, 경찰 폭력에 의한 희생자 현황 통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