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르크 G20 반대투쟁 : 2017년 9월 15일, 어느 수감자의 편지


(Prisonnier politique? Risque du ‘prisonnierisme’. Contribution au debat sur la solidarite.)

“정치범? ‘Prisonnierisme’의 위험성. 연대에 관한 고찰” 기고문


 저는 많은 동지와 마찬가지로 함부르크 G20 반대투쟁에 참여했다가, 현재 독일 감옥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스스로를 사법 감시 체계 혹은 음모의 희생양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뭔가 대단한 정치범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감옥은 현실 세계의 구체적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현 세계의 사슬 속에, 많은 사람이 법률 시스템에 의해 잔인하게 학살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현대 사회관계를 전복시킬 위협이 되는 “잠재적 파괴의 전위”를 자처하며, 동료 수감자, 활동가와 제 자신을 더 이상 ‘교육’시키려는 게 아닙니다.


 감옥, 법정투쟁 등에서 제 작은 사례는 많은 사건 중 하나일 뿐입니다. 저는 현 상황을 직시해야 합니다. 저들은 제가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며, 반성하길 바랍니다. 저는 저들의 공세를 깨부수고, 이에 맞설 것입니다. 저는 자유를 박탈당한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고민해봤습니다. 제게는 활동가 사이에 팽배한 감옥에 대한 과도한 낭만화, 수감생활 ‘신화’를 깨부술 기회가 있습니다. 이것이 교차하는 맥락을 살피며 탄압, 수감이라는 제도적 틀에 갇힌 제 상황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훨씬 더 총체적, 세계적 폭압기구를 연관 지어 생각해봅니다.


 글로벌 사회 질서에 문제제기하는 민중에 대해, 일정한 탄압이 가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취약한 사회적 배경(빈곤, 배제)을 가진 많은 이에게, 이런 탄압이 현 세계 ‘정상 질서’에서, 딱히 예외적인 건 아닙니다. 수많은 민중이 끔찍이도 침착한 판사, 체제의 따까리들에게 공격, 침탈, 해산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는 슬프고도 평범한 일상적 억압의 연장선일 뿐입니다. 빙산의 일각입니다.


 “모든 정치범 석방” 요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슬로건과 그 발언에서, 사회의 모든 것을 생산하는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가 없습니다. 이런 맥락으로는 연속성, 확장성을 띌 수 없고, 이게 바로 억압의 최종 목표입니다. 다른 죄수와 정치범을 구분 짓고, 차별화하는 것. 예를 들어, 우리는 제3국 감옥에서 석방을 요구하는 언론인과 같은 공동의 집단적 책임감을 가지고 있진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사회적 억압·통제 기제로 여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과도한 억압과 관련이 있다기보다, 그저 편견과 불의를 내포한 ‘사법 통제’의 평범한 본질일 뿐입니다. 평범한 요소는 중요합니다. 경찰, 사법부, 언론의 차별, 배제 전략으로 단순하게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치범”과 일반 법률 간의 연관성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국면에서, 각 개인이 사법 당국에 의해 핍박당하고 유죄판결을 받고 있기 때문에, 제 문제의식은 조금은 도발적인 맥락입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더 자주, 일반 죄수와 정치범을 구분지어 차별화하는 것이 제게는 특히 부적절하게 느껴집니다. 수많은 사람이 수감되어 있는 이유와 감옥 밖의 투쟁을 연관 지어 사고하는 문제가 제게는 훨씬 더 와 닿는 과제입니다.


 억압의 주된 목적은 봉기를 개별화하여, 이를 소수의 사람이나 소그룹으로 분산·축소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으로 소수를 고립시켜, 정치 드라마 속에서 많은 관심과 영향력을 독점하는 활동가의 “기동력”을 고사시키고, 이들이 얻을 게 거의 없는 상황을 연출하려는 개수작입니다. 이를 통해 어느 순간 갑자기, 초창기에 이목이 집중되었던 활동가들의 영향력이 사라지게 됩니다. 한편, 우리 모두는 공통적으로 사법 탄압 희생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생자의 연대라는 측면에서 의인화(personification)와 개별화는 운동적 성과의 평등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가뜩이나 적은 활동가와 더욱 고립된 활동가의 경우는 오죽하겠습니까?


 같은 맥락으로, 공론장에서 유/무죄를 따지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건 변호사가 할 일입니다! 우리가 유/무죄에 대해 떠드는 행위는 사법 시스템을 간접적으로 정당화할 뿐입니다. 국가의 독점적 법률 적용을 확대재생산할 뿐입니다. 국가는 언제나 악랄하게 우리의 삶을 앗아가기 위해, 노예제에 기반을 둔 폭력 독점의 근원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공통적으로 유죄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그 생각에서 분출해 나오는 직접 행동은 유죄입니다.


 감옥은 가장 악명 높고 폭력적인 현대 사회의 축소판입니다. 그렇지만, 분할·분리·감금은 삶과 조직생활 속에서, 현대인의 관심사, 주로 직장에서의 ‘소외’를 통해 다소 미묘하게 희석됩니다. 우리는 이미 빠져나올 수 없는 거대한 노동 수용소이자 사회라는 감옥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재빠르게 ‘유죄’ 판결을 받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이 반강제적으로 불법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회가 양산한 많은 범죄자가 이곳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비참하고 불안정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지배자에게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삶을 가꿔나가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이들의 노력은 처벌받아야하는 특별한 “범죄”가 아니었음에도 주로, 법이라는 미명하에 유죄선고를 받아야했습니다. 이들은 매일같이 유죄 선고를 받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표준’에 어울리지 않고, 유아기 알약을 처방하듯이, 사회가 정한 질서에 따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감옥 안에도 많은 연대 투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수감자는 모든 이들이 각자 자신을 위해, 우리 사회에 주입시켜놓은 통제, 지배, 권력 메커니즘 재생산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현 질서에서 벗어나려하지 않는 일부 수감자를 마냥 이상적으로 바라보진 않습니다. 이들은 정말 비참한 조직 사회의 첫 희생양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감옥에 수감 중인 소외되고 배제된 자들이 여전히 다른 가능성을 여는데 공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옥 시스템은 언제나 우리를 감시, 억압하며, 더욱 더 고립, 분리시키고자 촉각을 곤두세울 것입니다.


 제 이야기는 감옥 내외부의 연대 캠페인을 축소시키거나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연대 캠페인은 수감 중인 활동가들에게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연대에는 막대한 노력과 비용이 듭니다. 수감자 입장에서, 친구와 동지들에게 지원받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저 역시 동지들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는 제 자신을 차치하더라도, 필수적인 지원입니다. 저는 이것이 감옥에 있는 활동가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항시적 사회 갈등 상황과 연결고리를 형성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우리 주변에 가해지는 억압이, 우리가 당연하게 이해당사자로써 관계 맺는 모든 사회적 연결망을 해체시키지 못할 때, 물질적·도덕적·정서적 연대는 더욱 더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실제로, 이러한 지원 체계는 항시적 연대 기금에 돈을 환원함으로써, 고갈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순환할 수 있습니다.


 저들은 우리를 통제하고, 두려움을 이용해 우리를 다스립니다. 그러나 적개심, 봉기, 분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수많은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좀 더 일관성 있게 연대해봅시다. 우리 스스로 물러서지 맙시다. 우리를 포섭하려는 경찰과 언론사의 마수로부터 벗어납시다. 저들은 실제로 그렇지 않을 때조차, 우리를 위협적인 존재라 간주합니다. 국가와 암묵적 동맹을 맺고 있는 언론의 사기성 레토릭에 넘어가지 맙시다. 저들의 분열 공작을 끝장냅시다. 저들의 프레임에 스스로를 가둔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쟁취할 수 없습니다. 연대는 여전히 고립과 정반대입니다.


 감옥에 갇힌 제 모든 동지들, “정치범”과 모든 재소자 동지들, 우리 모두 힘냅시다.


 법률팀 동지들과 지지를 보내주는 모든 동지들께 감사드립니다.


2017년 9월 15일 함부르크, 어느 수감자 중 한명 올림.

posted by macrondemi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