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내일 총집결을 호소하는 ‘데 페뜨’ 광장 노란 조끼 동지들의 글을 게시한다!


 7월 27일 토요일, 37차 행동에서 노란 조끼는 프랑스 전역을 누볐다.


 37차. 전례 없는 상황이다. 37차 행동 이후에도 또다시 결집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혹자는 우리가 아무 것도 “쟁취”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우리가 끝없는 시위에 싫증나서, 소리를 높이고, 운동을 구조화하고, 되살리고, 그 자체로 혁신하면서, 다른 형태의 행동을 촉구하는 것에 유감을 표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어떠한 비용을 치르더라도, 변화를 원한다.


 아직은, (운동의) 패배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37차례 토요일 행동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것은 운동의 성과이고, 우리가 자랑스레 여길만한 것이다. 한여름 무더위에, 파리에는 오후 내내 행진을 하기 위해 수천 명이 모였다. 여전히 즐거움과 환희가 가득한 행진은 경이로울 정도로 활기찼다.


 이번 주 토요일, 우리는 행인들의 놀라워하는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거리를 지날 때, 행인들은 눈을 크게 뜨고, “뭐라고? 노란 조끼가 아직도 있다고? 그거 다 끝난 얘기 아니야?”라고 했다.


 아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로 우리의 매주 토요일 시위를 보라. 노란 조끼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예수쟁이들”, 몇 주 전부터 지역 신문이 우리를 끝없이 경멸하며 쓴 제목이다.


 “최후의 노란 조끼를 만나보세요”, 며칠 전 <Liberation(리베라시옹)>의 헤드라인이다. 그들은 마치 인류학자가 인디언 보호구역에 파견되는 것 마냥, 기사 작성을 위해 로터리에 특별취재단을 파견했다. 편집자의 시각에서, 노란 조끼는 더 이상 사람으로 인터뷰한 것이 아니라, 그저 신기한 원주민 같은 존재이다.


 기존 제도권 체제는 우리가 사라지길 바라고 있다. 저들은 11월 17일부터, 우리를 절실하게 뿌리 뽑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때(끝나는 때)가 언젠데?” 허구한 날 질문을 한다.


 저들은 “이제 장난 그만 칠 때도 됐다.”라고 주장한다. 마크롱의 하수인 언론은 생업으로 돌아가라, 현실로 돌아가라, 이제 “진정하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스스로 역사를 만들고, 산 증인이 되고자 한다. 스스로의 사명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기에, 투쟁이 시작된 첫날부터 계속해서 역사를 만들고자 노력해왔다.


 "뭐라고? 노란 조끼가 아직도 있다고?“


 그래, 이 사람아. 노란 조끼는 아직도 있다. 멀쩡하게 살아있다. 그리고 노란 옷을 입고 노래하고 있다.


 우리는 최후의 갈리아 마을 주민이 아니다. 또한, 현 체제가 포섭하고자 애쓰며, 과거 영광에 집착하는 참전용사 따위가 아니다.


 37차 토요일. 우리가 머리를 잘라도, 그것은 재생된다. (히드라가 노란 조끼가 된 것처럼 보인다.)


 37차 토요일. 봉기의 불새. 우리는 잿더미에서 다시 태어난 불새이다.


 37차 토요일. 현 체제의 모든 하수인들이 중무장하고 총기를 꺼내 발포하려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무언가 연기가 피어오르고,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오랜 세월 누적된 분노로 타오르는 횃불은 꺼뜨릴 수 없다.  


 37. 우리는 여전히 현 체제에 저항하는 악몽의 파르티잔으로 남아있다. 현존 질서에 언제나 저항하는 파르티잔이다.


 37. 우리는 보이지 않는 뿌리를 가진 거친 잡초와도 같다. 저들은 매번 맹렬한 탄압을 가하지만, 우리는 다시금 탄압을 뚫고 투쟁에 나선다.


 자, 우리는 왜 계속해서 투쟁하는가? 이미 우리의 토요일 투쟁은 주중의 단조로움을 분쇄하고, 해방된 공간을 열었기 때문이다. 아드레날린과 흥분으로, 우리는 독특한 색채와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우리는 투쟁을 기억하고, 굳건한 결의로 함께 행진에 나서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위대한 혁명적 대중과 같이, 일정 부분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


 37. 37. 37. 우리는 오랜 세월 누적된 분노로, 가뭄의 여름에서 불타오르고 있다. 그동안 잊혀왔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우리는 모든 새로운 논란거리, 예산삭감(긴축), 경찰의 만행 등을 날려버릴 수 있는 불씨이다.


 겨울 노란 조끼 ; 여름 노란 조끼. 가을이 오고 있다. 우리는 지게차 투쟁의 절정으로, 건재하게 돌아왔다.


 노란 조끼는 스스로를 항시적 봉기 상태라고 선언했다. 매주 토요일마다, 우리의 운동이 일시적인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토요일 시위는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고 말하는 상징적인 맥락이다. 조만간, 불타오를 것이다. 이 사회가 무너지지 않는 한, 노란 조끼는 투쟁을 이어갈 것이다. 우리는 항상, 첫 심지에 불을 밝힐 봉기의 불꽃으로 살아있다.


 우리 스스로가 선구자이기 때문이다. 닭장차가 즐비한 여러분의 창문 아래, “마크롱 퇴진!”이 울려 퍼지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행진 구호가 아니라, 일종의 예언이다. 거대한 격변을 발표하는 것이다.


 토요일 투쟁에서 가장 고령은 74세였다. 그는 지난 12월부터 투쟁에 참여해온 남성이다. 여전히 확성기로 무장하고 “마크롱 구속”을 끊임없이 외친다. 가장 어린 사람은 지난 11월말 시위에서 샹젤리제를 질주하기도 했었던 13세 학생이었다. 노란 조끼는 그에게 제2의 가족이 되었다.


 이 사회, 이 세상 모든 영역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다. 아주 역동적이었다. 우리는 각양각색의 군중이다. 우리는 그동안 (시위를 위해) 전혀 모여본 적이 없던 사람들과 함께 모이고 있다. 프랑스 사회 그 어디에도, 이처럼 한데 뒤섞여 단결해본 사람들은 없다. 우리는 이전에도 항상 여러 차례 단결했었던 다양한 “전문가”이자, 도깨비 같은 존재이다. 저들은 우리를 끔찍이도 싫어한다. 그러나 노란 조끼를 특정 범주에 가둘 순 없다. 군중의 모습은 매우 다양해서, 분류할 수 없다. 그래서 이상하기도 하고, 심지어 의심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누구야?" 구경꾼은 궁금해 한다. 우리는 분노한 사람이다. 이상을 꿈꾸는 사람이다. 고통받아온 수많은 사람이다. 우리의 공통된 특징은 정의에 목말랐다는 것이다. 여러분도 곧 정의를 원하게 될 것이고, 더 이상 우리를 경멸하지 못할 것이다.


 37차 토요일 투쟁이 있었다. 그 이상이라고 안 될게 뭐 있는가? 노란 조끼 200차 주말 행진도 우스운 일은 아닐 것이다. 현 체제에 파열구를 내기 위해 필요하다면, 우리는 그것을 할 것이다.


 "그냥 일하고, 소비하고, 입 닥쳐라!" 이것은 우리 사회를 요약해주는 마법의 공식이다. 저들은 현명한 시민을 원할 뿐이다. ... 그러나 노란 조끼는 이런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이 체제가 더 이상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단지 임금 몇 유로 때문만이 아니라, 지구를 파괴하는 현 체제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


 우리 삶의 터전이 불타고 있는데, 집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는 없다.


 가을 투쟁도 뜨거울 것이다. “세상의 종말이나 월말이나 (비참하긴) 매 한가지. 똑같은 문제, 똑같은 투쟁”이라는 슬로건으로, 이미 9월 21일 새로운 집중투쟁이 준비되고 있다. 9월 21일 45차 토요일 행동, 전국 어디에서나 거대한 시위의 물결이 일어나길 기대해본다.


 37. 그렇다, 우리는 여름을 보냈다. 이 투쟁은 더 이상 의심의 그림자에 덮여있을 수 없다. 이번 37차 토요일 투쟁이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면, 그것은 가라않지 않는 분노가 나타났음을 다시금 선언하는 의미이다. 


 우리가 누구인가!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자!


- 데 페뜨 광장 노란 조끼


* Source (출처) :

https://acta.zone/la-fleur-au-transpalette-intervention-des-gilets-jaunes-de-place-des-fetes

posted by macrondemission